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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 구슬이의 1주기를 맞으며
잡담 |
2006/03/24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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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난 네가 싫었다.
넌 전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개가 아니었어. 몸이 털로 뒤덮인 왠만한 4족보행동물은 내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러니까 난 널 미워하진 않았어.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지.
내 기준에 넌 너무 작은 개였고, 나이도 많았고, 사람들에게 달라붙지도 않았고, 성격도 나빴고, 식탐도 지독했던 데다, 난 차라리 대놓고 짖는 개가 좋지 너처럼 사람들 뜨한 눈으로 바라보다 칵 물어버리는 타입은 진짜 별로였거든.
난 너도 그걸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어차피 네 녀석은 처음 보는 사람- 혹은 네 가족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이지 않는 타입이니 마찬가지였겠지. 넌 나에게 있어 마치 매력적인 싱글마더의 심술맞은 어린 아이 같은 존재였어. 널 적절히 견뎌내지 않으면 친한 친구네 집에 있을 수가 없잖니. 그치?
그러니까, 넌 내 생애 최초로 미운 정의 대상이었던 놈이다. 내가 가면 무슨 뒷방 할망구마냥 꽁한 얼굴로 짖어대는게 얼마나 얄미웠던지. 게다가 넌 내가 누구인지 빤히 알면서 짖어댔지.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름,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네 의식 같은 거였을 거야. 마치 귀여운 손주가 마음에 안 드는 애인을 데려올 때마다 이름을 굳이 잘못 불러주는 할머니처럼 말이야.
보통은 그런 것은 다 그냥 넘겼겠지. 하지만 어느날 결국 견딜 수 없었던 난 네게 반격을 했어. 아마 내 생각에 - 그건 네가 일생 들어본 중 가장 커다란 울부짖음이었을 거야. 인간의 음성이 아닌, 동족의 울부짖음 말이다. 난 지금도 그 때의 네 표정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충격을 받은 개의 표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본 셈이야. 그 순간, 아마 난 너의 세계를 일부 바꾸어 버렸던 것 같아. 인간이란 100% 만만한 존재였던 네 세계에, 네 주인의 해석에 따르면 "무언가 인간도 동물도 아닌 것" 이 들어앉아 버렸으니까.
그런데 - 아마 네게는 반가운 일이었나 모르겠다만 - 사실 그날 이후 문득 깨달은 게 있었지. 난 네 녀석에게 익숙해져 버린데다, 더해서 네가 꽤 좋아져 있었단 말이지. 물론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다만, 이제는 내가 집에 들어가도 잘 짖지 않게 됐지. 너도 내게 익숙해 진 거야. 마음에 안 들어도 손주의 애인이 손주며느리가 될 것임을 인정해야만 했던 할머니이기라도 한 것처럼 - 너와 나의 평화협정은 늘 그런 식이었지. 그러니까 난 그런 네 모습에 정이 붙어버린 거야. 그 고집스러움에, 딴에는 머리굴린다고 굴리지만 다 드러나는 속에, 그 집착스러운 식탐에, 그 칼날같은 오만함에 아예 정이 붙어버린 거다. 그래, 심지어는 네 주인이 그렇게나 잘 한다고 칭찬한 그 "목!" 에마저 말이지.
너도 아마 비슷한 과정을 거친게 아니었을까. 가끔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부하가(...) 데려오는 커다랗고 제멋대로인 무례한 생물의 방식에, 너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버린 거였겠지. 그 증거로, 넌 단 한번도 날 물지 않았잖냐. 네 주인을 돕느라 널 붙들고 끌어당기고 무릎 위에 앉히고 목을 붙들어도 그냥 뒀잖아. 심지어는 손을 핥은 적도 있었지. 뭐, 그거야 나름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지만(...이젠 기억도 안 난다. 천하장사 때문이었냐 키스톤 때문이었냐. 아무튼.) 솔직히, 그때쯤의 난 네 녀석을 꽤 좋아했기 때문에 기쁘기도 했었지.
그래, 네녀석이 아무튼 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건, 홍대 애견카페에서의 일이었어. 네놈, 처음 보는 허스키들과 말라무트와 세퍼트에 완전히 기가 질려 있었지? 그날, 애견카페에 들어서는 날 보자마자 무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네 녀석을 보고, 심지어는 네 주인조차 기가 막혀서 경악했었지. 물론 나도. 난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네 녀석이 내게 꼬리를 흔드는 광경을 본 적이 없어. 그 때 네 녀석이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생생히 기억해. 그래, "마음엔 안 드는 놈이지만 아무튼 이런 위험한 곳에서 그나마 의지가 될 큰 동물같은 거" 였겠지. 비유한다면, 마치 자기가 쫓아내 버린 옛 경비대장에게 신병을 맡기고 어두운 숲길을 지나야 하는 공작부인같은 표정이었어.
네가 수술을 하고 진짜로 "늙어"가던 모습을 난 세세히 기억하고 있어. 네 눈 안에 언젠가부터 끼어 떠나지않던 백내장, 기묘한 각도로 꺾여 있던 네 꼬리, 그 꼬리는 원래는 꼭 세퍼트의 꼬리같았다던가. 사진에서만 보았던 네 어린날의 검은 털, 언젠가부터 계속 흰 털이 되어 나중에는 "그 집에 흰 개 살지?" 라는 오해까지 자아냈었던 것도 생생하구나. 넌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어. 침대에 올라가지 못하게 되고 점점 짖지 않게 되고 느려지고 식탐만 느는 널 보면서, 나는 네 주인이 널 보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말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마 난 네가 좀더 남아주길 바랬던 것 같아. 내 친구의 곁에, 그보다도 내 세상에 있어주길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 너희의 수명은 어떻게 해도 우리보다 훨씬 짧잖니. 이미 네 수명부터가 다른 개들보다 훨씬 장수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난 네가 갈 것임을 알면서도 남아있길 바랬다.
친구는 널 보낸 뒤 적어도 1년은 있다가 둘째를 들일 거라고 했지만, 난 사실은, 걔가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보내고 다시는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그리고 넌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빈 자리는 어떤 식으로건 채워지게 되어 있는 거야.
지금 네가 있던 그 방에는 다른 녀석이 - 훨씬 체구가 큰 녀석이 - 앉아 있다. 너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소란스럽고 부산하고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쾌활한 성격의 녀석이지. 녀석은 내가 가면 아주 정신없이 달려들어. 내가 "놀아줄"거라는 걸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지. 너와는 달리 사람 무릎에 앉거나 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 식탐이야 굉장하지만 사람이 먹는 것을 채가려고 하진 않지(웃음) 너는 "목!"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녀석은 "앉아!"를 할 수 있어.
그 녀석이 너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가끔은 놀랄만큼 너와 비슷한 데도 있어서, 그래서 간혹 네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마 네 주인은 더 심할 거야. 내가 이럴 정도니까.
이렇게 차분차분 정리하는 동안, 네 녀석이 다시 여기 있구나. 온 적 없는 내 고시원 방 매트리스 위에 앉아 그 구슬같은 눈으로 이 쪽을 보고 있어. "도대체 저 무례하고 건방진 큰 동물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야" 하는 그 할마시같은 눈으로 이 쪽을 보다 입맛을 다시고는 슥 엎드려버리는게 왜 이리 생생할까.
네가 죽었을 때, 지인중 한 분은, "구슬이라는 개가 어떤 개인가"를 묻는 다른 분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내가 본 어떤 개도 구슬이만큼 사랑받고 행복했던 개가 없었어" 라고
좋겠다 이 못된 것아. 혼자 저 쪽에서 팔자좋게 늘어져 있겠지. 네 등에 나 있던 그 까슬한 털의 감촉이 지금도 내 손에 이렇게 생생한데. 얇고 서늘하던 귀의 감촉이, 작은 앞발의 깔깔한 바닥이, 작은 발톱이, 주인님 덕분에 토실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허벅지까지도 전부 생생한데.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널 처음 봤을때 싫어했었어.
보고 싶다 이 빌어먹을 것아. 다시 만나면 귀부터 잡아당겨 줄 줄 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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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Cumi'z Cave Canem 2006/03/24 13:51 x
제목 : 구슬이에게.
3월 24일 - 구슬이의 1주기를 맞으며 by 황금숲토끼
조금 있으면, 앞으로 열시간 남짓만 더 있으면, 네가 가버린 지 꼭 365일이 된다. 오늘 하루만큼은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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