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 고티에, 쥘 페리 어르신 밑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 곳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의외로 지낼만 합니다. 물론 겨울엔 춥습니다만, 적어도 모스크바만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당신이 알듯 전 원래 추위를 잘 안 타는 체질인데다 바깥 외출도 잘 안 하는 습관이 있어 별로 큰 일은 없었습니다. 아, 지금쯤 궁금해 하겠군요. 사정상 이 편지에 제 이름은 쓰지 않았지만 - 어차피 써도 모르는 이름일테니 상관 없겠지요- 당신이 제가 누구인지는 모를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5년 전,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꽤 미안했습니다만, 저도 제가 여기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밖에는 못하겠군요.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페리 선생께서야 아마 어느정도는 예상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작자의 행동을 어느정도 방관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에 대해선 더 얘기하지 않도록 하지요.
어쨌건 5년만에 이렇게 뻔뻔하게 연락을 넣는 것은, 부끄럽게도 더욱 뻔뻔스러운 얘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일이 걸릴수록 인간이란 얼굴 두께를 늘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만큼 매우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헤르 고티에, 전 지금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떠나려 합니다. 목적지는 빈입니다. 제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간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어느정도로 위기를 동반하는 일인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은 미리 안배해 두었지만 역시 빈에 도착한 뒤가 문제가 되겠지요. 우리 챈트리는 명성높고 건실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어디 있는가를 명백히 밝히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갖추고 있기도 하지요. 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도착한다면 최대한 빨리 챈트리에 돌아가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이 편지에 대해 어르신께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분께 언제나 제가 '우리'에 대해 보여왔던 헌신과 봉사를, 순종을 기억해달라고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분의 명을 어긴 것은 단 한번 뿐이며, 이제는 그럴 일이 전혀 없음도 그 분은 매우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째서 5년이나 뒤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찬찬히 얘기드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빈에 도착한다면요.
내일 저녁 기차로 출발할 예정이며, 제가 마련해 둔 빈의 거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주소를 공개하는 것이 어쩌면 제 사형선고문에 사인을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전 적어도 '우리'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실용적이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르신은 아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넘어가야 할 산이 많지만요.
굳이 서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 1904년 2월 10일자로 되어 있는 사인 없는 편지의 내용. 편지는 겉봉에 주소가 없는데도 정확히 수신자에게 가 닿았으며, 이례적으로 빨리 배달되었다. 동봉된 쪽지에는 변색된 붉은 잉크로 의미없는 낙서가 그려져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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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방에서 메종 드 로즈, 그리고 끝은 Rui로. 3년 넘게 끌어왔던 텔러 난나님 아래 패닉의(......) 뱀파이어 크로니클,빅토리안 에이지가 끝을 맺었습니다. 잠잠했던 엔딩과 달리, OR로 진행된 플레이어 개개인의 에필로그는 거의 "모두가 주인공인" TRPG특유의 요소를 매우 잘 보여주며 화려하게 끝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딱 한명 남았거든요.)
제 주변 분들 중에서는 그 얘기를 들으신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제 캐릭터, 제임스 블랙번은 꽤 불쌍한 녀석이었어요. 인간으로서의 삶은 평온한 편이었고, 뱀파이어가 된 과정도 트리미어로서 매우 자연스럽고 순탄했습니다. 그 대가였는지 몰라도, 연인이 살해되어 버리죠. 그녀의 살해범을 찾아다니다, 그것이 사실은 본인이었고 기억은 조작되었으며, 게다가 더해서 자신이 위로는 프린스까지 가담했던 음모를 이루던 톱니바퀴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지요. 이후 50년간을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며 삽니다. 과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고, 청상 홀애비가 한을 품으면 50년 후 런던에 피바람이 분다는 강렬한 교훈의 산 증거이기도 하지요. 1850, 1875, 그리고 1898. 세 번의 세션동안 줄기차게 제임스를 연기하며, 뱀파이어가 어째서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어가는지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라고 괴물이 되고 싶은 된 것은 아니지요. 상황과 사건이 그들을 점차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건 희생하는' 종족으로 만들어갈 뿐입니다.
그는 한때 사랑에 빠졌던 젊은이였지만, 결국 스스로의 죄를 직시하기보다 남을 공격하기를 선택한 비겁자였고, 삶의 무게 전체를 복수에 두는 것으로 연명한 정신병자였어요. 그런 주제에 엔딩의 그는 무려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이제부터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겠다고 뻔뻔스럽게 선언하고는, 빈으로 실려가는 자신을 탈취한 남자와 함께(......) 러시아로 가 버립니다. (저것이 왜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에대해서는 눈물없이는 펼칠 수 없는 나름의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_=)
뭐, 이후야 알 수 없지만, 전 제임스가 다시는 토퍼에 빠지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디어드리를 보냈고, 광적인 복수심을 접었고, 삶의 의미를 시간의 흐름에서 찾아냈습니다. 모든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지 않는 한, 그는 아마 인간사의 한 켠에 물러나서 때로는 관여하고 때로는 손을 놓은 채 시대 자체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텔러! 그리고 함께 했던 분들 모두,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언젠가, 이 녀석을 주인공으로 뭔가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
- 주말에 집에서 회사일 하다가 쓰는 거니...밑의 글의 덧글에 대한 답은 좀더 생각을 찬찬히 해 보고 답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비공개로 달아주신 Y님, 진지하게감사드리며 정말 열심히 고려해볼 것임을 말씀드릴게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