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후기는 한국 에비타 공연에 대한 혹평에 가깝습니다. 그 공연에 대한 제 점수는 학점으로는 D-입니다. 그러므로 제 평은 대단한 혹평에 가까울 겁니다. "남들 재미있게 본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초치지 말라"시는 분들도 물론 계실 수 있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혹여라도 2006 한국 에비타를 재미있게 보신 분께서는 제 평을 되도록 읽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가깝게 아는 분도 꽤 괜찮게 봤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기서 제가 기대한 에비타는 결국 "제 시각의" 에비타일 뿐입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죠.11월 30일 8시 저녁 공연, 좌석은 R석으로 1층 15열 3, 4번이었습니다. 무대는 가리지 않았고 잘 볼 수 있는 자리였으되, A석과 B석을 홀랑 3층으로 올려보낸 9만원 "저가"공연을 두고 징징댄다는건 좀 거슬리는 기분이었습니다.
LG야 뭐, 제가 워낙 막귀라 세세한 음향 구분 못해도 음악은 좋았습니다. "음악"은요. 일단 생음악이라는 것이 좋기도 했고, 명확한 오케스트라 반주가 듣기 기분도 좋고 다 좋았는데, 그게 너무 자랑스러웠던지 오케스트라 볼륨이 지나쳐서 배우들 목소리가 간간히 묻히더군요. 아무리 에비타가 유명작이라고 해도 기왕 같은 나라 사람들이 하는 건데 메리트가 줄어들잖습니까(먼산) 아무튼, 오케스트라 반주는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시 웨버의 음악입니다.(끄덕끄덕)
(루케니처럼 웃으며 손을 비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연평을 시작할까요.
이번 한국에서의 에비타는 1막 곡 구성은 1976년 판과 유사하고 2막 곡 구성은 1996년 DVD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피날레는 제가 어느 엘범에서도(2005년 브레멘과 2006런던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것 때문에 에바의 "캐릭터"에 상당한 균열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세부 곡평으로 들어가겠습니다.
A Cinema In Buenos Aires, 26 July 1952
- 영화 내용이 바뀌었더군요(웃음) 음악은 그대로라 영화 내용과 음악이 조금 안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름 또 들어맞는 것이 괜찮았습니다. 이 영화 내용이 만일 공연마다 조금씩 바뀐다면, 이거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할 것 같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이 영화들은 늘 뒷내용이 궁금할 때쯤 끊깁니다.
영화가 중간에 멈추자 사람들은 모두 불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숙연한 목소리의 (좀더 당황한 목소리였어도 좋을 것 같지만요) 발표가 따릅니다. 에바 페론이 죽었다고 말한 순간 잠깐 정적이 오는데, 제 취향인지는 몰라도 그 정적이 너무 짧아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오열보다 비명이었는데) 엎어질 때, 만일 제가 에비타의 내용을 잘 모르고 보러 왔다면 영화관에서 살인사건이라도 난 것으로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더군요(어이). 슬퍼하는 사람들은 좋았습니다만, LG아트센터 무대가 지나치게 넓게 느껴질 정도의 사람들이어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9만원이면 이거밖에 안된다고 시위하는 듯 한 느낌이랄까요.
Requiem For Evita
레퀴엠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의외로 앙상블들의 사운드는 무지무지 빵빵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인원수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더군요. 앙상블은 다해봤자 18명쯤? 근데 30인급 그 이상의 소리가 나옵니다. 물론 앙상블 여러분이 혼연의 연기로 음성분신술을 행하실 가능성이 없지 않겠습니다만, 성가대 경험은 꽤 있어서 사람이 많을 때 어느 정도의 소리가 나는지 아는 사람으로선, 절대 30인급 이상의 소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더군요. 아무튼 레퀴엠 합창 부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편텀이 그렇게 열심히 설파하던 음악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냥 듣고 있으면 어느 뮤지컬 어느 넘버인지 모르더라도 사람을 망연자실하게 만들고 먹먹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음악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육영수 여사 서거시, 사람들은 독재자나 그의 부인이 죽었다고 기뻐한 게 아니라 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했다고 하죠. 국가적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음악이고, 웨버는 정말 음악의 마술사입니다. 간달프급이에요(어이)
Oh What A Circus
감동적인 합창을 선사했던 소수의 군중은 곧 체의 노래에 배경이 되십니다. 슬프게도 에비타가 백성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지 광활한 무대에서 다들 썰렁하게(정말 썰렁하게!) 부루스를 추기 시작하셨지만, 그 썰렁함은 곧 잊혀졌습니다. 체가 참 충격적이었거든요.
여기서 밝히건대, 에비타의 “체”는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딴 캐릭터인 건 맞는데, 실제의 체 게바라를 같은 시기 대입한 건 아닙니다. 진짜 체 게바라는 1928년 생이고, 에바가 영부인이 된 것은 1943년, 죽은 것은 52년입니다. 에비타 뮤지컬 배경 당시 체 게바라는 에바의 절정기만 생각해도 15살부터 24살이고, 이때에는 정작 체 게바라 본인은 매우 성실히, 혁명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의대 다니고 있었습니다(……) 뮤지컬의 체는 결국 하나의 “가상 캐릭터”로서, 때로는 에바를 적대하고 때로는 에바와 동조하고, 어떤 때는 비난하고 어떤 때는 조소하고 어떤 때는 이해하는 마음속의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체 게바라를 모티프로 한 이상, 체는 기본적으로 서민 편에서 생각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1980년대 운동권 학생쪽이 제일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굳이 수다스럽게 체에 대한 설명을 구구절절 붙인 것은 남경주씨의 체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남경주씨의 아이러브유 공연은 엄청 재미있게 보았었고, 그래서 매우 호감가는 배우님이셨습니다만, 적어도 이 분이 에비타의 체에는 전혀 안 맞는다는 걸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체가 꼭 분노만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비웃을 수도 있지요, 실제 개인적으로 제가 최고의 체로 치는 76년도 콤 윌킨슨의 체도 대단히 잘 비웃습니다. 그런데, 뼈있는 조소와 랄랄라 광대놀음은 다른 겁니다. 전 남경주씨의 체에 ‘프로작을 집어삼킨 루케니’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만, 가락에 맞지 않는 박자무시 번안에 입을 빨리 놀리시느라 바빠 가사 전달이 잘 안되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전반적으로 명랑 유쾌 상쾌한 남경주씨의 스타일과 얇은 목소리 덕에 체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개그 캐릭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조소가 통쾌해서 웃는 게 아니라 ‘ㅋㅋㅋ’하고 비웃게 만드는 체라니,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체도 아르헨티나 사람입니다. 자기 나라가 무너지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ㅎㅎㅎ ㅋㅋㅋ 에헹~ 이랬지롱~ 모드가 되어버리니, 남경주씨가 광대 컨셉의 체를 원했다 해도 이건 오버입니다. 물론 체가 굳이 혁명만을 외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혁명가 체 게바라가 아니라 그냥 아르헨티나의 ‘체’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적어도 ‘아르헨티나의 체’이며, 나라를 망치는 데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에바가 정당한 일을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그는 그것을 비웃고 반박합니다. 그런데 반박에는 힘이 실리지 않고 분노는 우스꽝스럽습니다. (체가 아르헨티나가 망가진 것에 대해 비판하다 쓰러져 끌려가는 거, 참 귀엽지 않았습니까?ㅋㅋㅋ) ‘체’가 어떤 캐릭터인가에 대해 배우도 연출가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부분은 잘 했지만 어떤 부분은 오류 투성이인 DVD자막보고 베꼈냐 싶었던 번역이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솔직히, 괴로웠습니다. 게다가 목 상태가 안 좋은지, 한 옥타프 휙 올려 부르는 부분에서(…굳이 올리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고음괴물인 콤씨도 그런 일은 안 하고 성실하게 부르시던데 말입니다)는 쇳소리까지 났습니다.
번안에 대해서라면, 차라리 가사 내용을 전부 해체한 다음 한국어에 맞게 의미만 살리는 번역이 필요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나치게 밀어넣느라 말을 두두두거리는 것도 걸리더군요. 뭐 넘어갑시다 =_=
아참, 그리고 그 와중에 흐느적 부루스를 추던 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탱고 스텝 좀 밟으시던 두 외국인 무용수 분들, 멋졌습니다.
On This Night Of A Thousand Stars
아구스틴 마갈디는, 탱고 가수 치고는 느끼가 조금 부족한 대신 짜증이 늘었는데, 체에게 하도 충격받아서 그런지 괜찮았습니다. 목소리가 제법 시원했어요. 무엇보다도 여기의 문제는 에바라서(……)
일단 무대부터 시작하자면, 이 뮤지컬, 적은 인원으로 밀고 가느라 참 힘드시겠습니다. 지나치게 빵빵해서 대사 잡아먹던 오케스트라 악기를 조금씩 줄이고 배우를 더 쓰지 그러셨어요. (유튜브에서 확인했는데, 76년 당시 캐스팅 무대 위의 사람들 수가 훨씬 많네요.) 아무튼 왼쪽 구석에 홰액 몰려 있는 카페 무대와 달랑 두 테이블에 앉은 합계 8명의 관객은, 마갈디가 그렇게 인기없는 탱고 가수일 것 같진 않은데 참 안습이었습니다. 9만원의 저가는 이럴 수밖에 없다는 시위십니까? 암튼 에바로 들어갑시다.
Eva And Magaldi - Eva Beware Of The City -> Buenos Aires -> Goodnight And Thank You
제가 본 에바는 김선영씨였습니다. 마리아 마리아에서는 “창녀부터 성녀까지”아우르는 마리아 역을,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창녀”인 루시 역을, 미스 사이공에서 간만에 민간인 여성인(…) 엘렌을 하셨군요. 본인도 인터뷰에서 “처음 에비타 오디션 소식을 접했을 때 ‘이건 딱 내 역인데…’라고 생각했어요. 천박하면서도 훗날 국모가 되는 에바의 이미지가 가슴에 와 닿았거든요.”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제가 본 “1막의” 에바는 참 이루 뭐라 말할 수 없이 천박하고 무뇌하고 몸 굴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이더군요. 김선영씨가 에바를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렇게 연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 어리둥절한 채 여쭤볼 수밖에 없는데, 대체 그 에바는 언제쯤 국모가 되나요? 뮤지컬에서 전 에바가 몸을 팔면서 출세했다는 것,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짜증을 몹시 쉽게 내는 타입이었다는 것, 인기 끄는걸 좋아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느끼질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체적으로 에바 페론보다는 이멜다 마르코스같았거든요.
그리고 이건 취향 문제임을 밝혀두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바이브레이션이 강한 음성도 음성이고, 올라가지 않는 음이면 차라리 음을 약간 내리시는 편을 권합니다. 가성 박지 마시구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에비타들이 악지른다고 욕 들어먹으면서도 진성으로 깩깩거리는 이유는, 그것이 에비타의 에바 페론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독재자의 부인이었으면, 정치가였으면, 자기 독자의 암살 리스트를 갖고 있는 악녀였으며, 훌륭한 선동가였습니다. 다행히 뉴 아르헨티나에서는 본인 한계를 넘어서는 음역의 음은 그냥 평준화 하셨습니다만, 다른 데서도 가끔 나오는 가성도 가성이고, 지나치게 흐느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바이브레이션 강한 노래들은 계속 듣고 있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본가의 문제인데, 한국 가사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는 “했죠~”로 억지로 요 어미로 끝내려 든다는 점입니다. 여자는 반말 하면 안됩니까? 죠나 요를 이용해 억지로 각운 맞춰봤자 내용만 이상해질 뿐입니다. 듣다가 풉 하고 웃게 되는 가사들 때문에 감상이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 뮤지컬 감상의 2대 난점이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이 뮤지컬은 유독 노래가 다 끝날 때 체가 나와서 한마디씩 쏘아주거나 덧붙여 주는 곡이 많은데, 그때마다 나와 스스로의 개그스러움을 설파하느라 사람들이 큭큭거리도록 만들었던 남경주씨의 광대연기였습니다.
넘어가, 에바 캐릭터는 이 극 전체에서 굉장히 심한 난조를 보이는데, 그건 김성영씨보다는 연출 쪽의 문제도 무지무지 컸습니다. 그녀가 창녀처럼 위로 올라갔다는건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고 연기도 좋았고 납득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어째서 있는 이들에게 분노를 보이는가는 정말 전혀 설명이 되지 않고 납득도 가지 않고, 그 분노의 표출 방식도 너무 유치한 방식으로 나타나서 이루 할 말이 없습니다. 영화를 보면 에비타 캐릭터의 분노와 원한이 이해가 가는 편인데, 76년 앨범을 들어도 강직한 에비타의 음성에 들어있는 좌절과 절규가 들리는데, 무려 연기로 직접 보고 있는 에비타가 히스테리쟁이로만 보인다는 건 문제가 아닐까요? 그 히스테리가, 에바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생동안 보이게 되는 깊고 끈질긴 증오와는 전혀 연관되어 보이질 않았다는 얘깁니다.
에바처럼, 사생아라는 이유로 애시당초 멸시받고 손가락받고 가난하게 시골에서 자란 여자가, 도시로 무작정 상경해 몸을 사실상 팔아가며 침대에서 침대로 승진하는 동안, 자신을 두고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 부자들에게, 자신이 다가가면 쓰레기통이라도 옆에 있는듯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어버리는 이들에게, 자기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새발의 피만큼 겨우 베풀면서 자기들은 호화롭게 생활하는 이들에게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영부인이 되었을 때의 에바는 사실상 양 우리에 들어간 굶주린 늑대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장영자가 처녀시절 동전 몇개를 아끼기 위해 왕십리부터 광화문까지 걸어다녔다는 얘기를 하며 눈물지었을 때 느껴지던 그 느낌, 아름다운 여성이 어떻게 다른 인간들, 자신보다 훨씬 부유하고 우아한 사람들을 생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굶주린 야수가 되어가는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없는 겁니다.
김선영씨의 에바는 제게 있어, 그냥 그 자리에서 잔소리 듣고 외면당했다고 "삐져서" 히스테리 좀 부리고 행패부리는 단순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그녀의 증오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책임한 선심과 인기 정책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그것이 나라를 망친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단순화로는 드러날래야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이 버전의 에바는 그냥 바보였습니다. 그것은 김선영씨 하나가 아닌, 연출과 번안의 총합적 실수라고 보기에 김선영씨 개인만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김선영씨의 노래와 연기는 (가성만은 솔직히 참기 힘듭니다만 =_=; ) 다 취향 문제로 넘긴다 해도, 에바의 캐릭터 망가뜨리기는 번안과 연출이 나란히 손잡고 머리에 꽃 꽂은 결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The Lady's got Potential(빠짐) -> Politics-The Art of the Possible
불행히도 이 곡은 빠졌는데, 문제는 바로 이 곡이 빠졌다는 겁니다 =_=; 사실 한국은 남미형 경제국가라, 이 곡 전반에 걸쳐 나오는 아르헨티나의 격변은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와도 엄청나게 닮아 있습니다. (솔직히 영화 보신 분들,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 지나가셨음을 아실 겁니다 =_=;;;; ) 불안한 민정 -> 쿠데타 -> 쿠데타 내분 -> 새로운 쿠데타 -> 손을 피로 더럽히지 않은 "부드러운 군인" 지도자 등장....하필 페론이 주장한 구호도 "셔츠만 입은 자들을 위한 정치"였습니다. 셔츠만 입었다는 것은 양복 웃저고리를 입지 않고 일한다는 것으로, 서민계층의 상징 같은 것이었지요. 이쯤 되면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 보통사람입니다."
아무래도 동원해야 하는 인원수 때문이었겠습니다만(먼산) 뮤지컬 전체에서 상당히 명곡인 이 흥겹고 신나는 곡은 송두리째 들려나가고, 대신 다섯명의 군인이 쿠데타 의자놀이를 펼칩니다. 원래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체가 부르던 거긴 한데, 넘어가고...뭐 사실 이 장면은 나름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페론의 성향을 잘 보여줬다고도 생각하고요. The Lady's got Potential이 빠진 것이 불만일 뿐, 군인 노래 자체에는 이의 없습니다. 영국에서는 다리걸어 넘어트리기로 표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의자돌리기로 표현했습니다만 나름 창의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노래의 번역에 대해서는 매우 할 말이 많습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것이 이 노래의 제목인데, 우리나라의 번역은 말 그대로 번안의 핑계를 대어 가사의 적극적 품질 저하를 꾀했습니다. "정치란 건 다 그런 것" 으로 시작되는 가사는 너무 일반적인 얘기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솔직히, 이번 에비타 공연에서 웨버는 살았지만 팀라이스는 죽었습니다. 음악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거기 기대서 번역은 대강대강 해치워버린 느낌입니다. 중요한 건 번역인데, "의도는 살리되 직역은 곤란"인건 맞지만 이건 정말 심했습니다. 솔직히, 안이합니다 =_=
Charity Concert ->I'd Be Surprisingly Good For You
송영창씨는 사실 이 뮤지컬이 몇년만의 재기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건 살이좀 붙긴 하셨습니다만 정말 열심히 노래하고 연기하시더군요. 이 분이 에비타 전체의 베스트였습니다. 전문 뮤지컬 배우는 아닌 걸로 알고 있지만, 정말 열심히 잘 하셨고, 연기도 공들여 하셨더군요. 배역 포인트도 조나단 프라이스와 일반적인 "독재자 페론"의 중간쯤이라는 느낌으로, 꽤 좋았습니다. Politics-The Art of the Possible에서는 꽤 귀여우셨고, 자선 콘서트 부분에서도 귀여웠지요.
다만, 그래도 이건 얘기해야겠습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에바와 페론이어야 합니다. 둘이 눈 맞는 노래거든요. 자선 콘서트에서 만난 두명은 그대로 눈이 맞으며, 파트너도 있던 주제에 "혼자"왔다고 "우연"한 인연을 기뻐하는 듯 하며 노래하지만, 노래내용은 전혀 러브송이 아닙니다. 여자는 슬쩍 유혹하며 "제가 원래 이렇게 급하지 않답니다. 계산도 계획도 없어요. 어리석어 보인다면 용서하세요. 밀어붙이고 싶진 않아요. 다만 제가 당신에게 엄청나게 유용할 거라는 걸 알아주세요. 전 놀랍도록 당신에게 쓸모있는 여자랍니다." 라고 하죠. 남자는 "난 당신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군, 내가 보고, 듣고, 아는것 모두 맘에 드는군. 나도 당신에게 쓸모가 있을 거요" 라고 얘기하는 노래입니다.
헌데, 이 둘의 노래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할 무대에서, 남녀 둘은 장승처럼 서서 노래하고 있고, 뒤에서 외국인 둘이 무대를 휘젓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눈부시게 흰 드레스와 정장으로 성장한 에바와 페론 커플이 아닌, 외국인 무용수 둘에게 홀랑 홀립니다. 에바와 페론이 주인공이 아니라, 저 둘이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무려 가수의 노래가 배경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는 조금 춤 흉내를 비슷하게 내긴 합니다. 아주 잠깐 어색하게.) 게다가, 저 빼는 척하며 찐하게 유혹하는 노래가, 한국어로 "친구가 되고 싶어요" 가 되는 순간, 정말 웃고 싶지 않았지만 푸우우웁 하고 웃음이 턱밑까지 올라오더군요. 친구우? 정말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러면 이 노래 직후 둘이 "어차피 남자건 여자건 연인이라는건 절대 없지. 파트너를 적당히 속이면서 기대는 것, 상대가 자길 돕고 지지하고 선전하길 바라잖아. 비난하지 마, 당신도 마찬가지니까" 라고 (물론 한국어로는 그 비슷한 좀 다른 내용입니다만) 노래하는게 전혀 안 삽니다. =_=
끝으로 하나 더. 이 공연 전반적으로 군중들이 페론, 페론 페론! 하고 외치는 부분을 전부 그냥 외침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원작이 갖고 있는 음악적 분위기가 줄어드는데 한몫 했습니다. 전 처음 그걸 듣는 순간 군중의 광적인 외침마저 음악적으로 불혐화음으로 만들어 일관된 가락요소로 표현하는데 감탄했었는데 말입니다.
Hello And Goodbye -> Another Suitcase In Another Hall
....후우, 이 노래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좀 많습니다.
일단, 영화판과 다른 곡 순서에 대해서는, 76년판과 같은 구성으로 했다고 이해하겠습니다.(2006년판도 그 부분은 76년판과 같더군요.)
76년판에서는 에바가 도시에서 고생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습니다. 에바는 상경하자마자 곧바로 탱고 가수를 차 버리고 사진작가부터 시작해 남자들과 놀아가 출세한 후 페론을 겟하고 곧장 정부를 쫓아냅니다(Hello And Goodbye). 그러면 정부가 서글픈 얼굴로 자신의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Another Suitcase In Another Hall을 부르고, 체가 "더이상 묻지마 Don't ask anymore" 라고 하며 아가씨를 보내죠. (한국 번역으로는 묻지 말라구우~하면서 또 개그떱니다. 음절도 안 맞고, 사람들이 쿡쿡거리는데 죽을 맛이더군요 =_=)
영화판에서는 에바가 Another Suitcase In Another Hall을 부르며 조낸 고생하는걸 보여준 후, 페론 을 겟하고 페론의 집에 가서 정부를 쫓아내며(Hello And Goodbye), 그러자 정부는 Another Suitcase In Another Hall의 후렴 부분을 부르고, 에바가 매몰차게 "더이상 묻지마" 라고 합니다.
76년판의 에바와 96년판의 에바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입니다. 76년판의 에바는 팜므파탈에 가깝고, 자신의 야심을 타고 날아올랐다가 꺾이는 야심가, 솔직히 악역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96년판의 에바는 좀더 인간적인 면모가 부여되고, 고생하고 올라가 결국 몰락하는, 더 동정가는 에바입니다. 06년 런던판은 이 둘을 조합시켜 더 서글픈 에바 상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보다는 더 이기적이고 야심가인 에바가, 결국 You must love me를 부르며 무너지는 겁니다.
문제는.......한국판 에바와 정부의 연기입니다 =_=
김선영씨의 에바만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에바는 정부의 모습을 보고는 분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씩씩대면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가서 노래를 부르며 정부의 물건들을 던지듯 처리합니다. 근데, 에바가 노래부르는 가사는 정부를 대등한 대상이나 질투의 대상으로 보고 싸우는 노래가 아닙니다. "안녕, 그리고 잘가. 난 더 해고하러 왔어. 이젠 다시 학교로 가야지. 이제껏 잘해왔어. 그가 널 즐겼을 거라 의심치 않거든? 괜히 놀란척 하지마, 문명인이니 친밀하게 하자구. 자, 어린 것아. 인형처럼 서 있지 말고. 니가 올 거라 생각하던 날이 왔어. 넌 여기까지 왔으니 살아남겠지. 자, 떠나시지, 우스꽝스런 얼굴!" 이라고 조롱하거든요. 오히려 노래는 부드럽고 조소하는 듯 합니다. 에바는 승자고, 단순히 예쁜 얼굴과 몸매 때문이 아니라 "쓸모"가 있음을 분명 인식시키고 들어온 레벨 99짜리 괴수인 셈이죠. 질투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어차피 자신도 침대에서 침대로 굴러 올라온 몸, 굳이 이제 해고된 어린 계집을 진지하게 상대할 이유조차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의 에바는 거기서 매우 치사하게 씩씩거리며 첩을 내쫓는 기생출신 후처마냥 천박하게 행동합니다. 그게 김선영씨가 생각한 에바인지 연출가가 원한 에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거야 원, 명기 출신으로 들어앉은 부인네가 본처도 아니고 주인방 시비(侍婢)를 내모는데 전력을 다하면 우습지 않겠습니까. 에바가 거기서 그 기세를 못 잡으니 정부 아가씨가 일어나 갑자기 처량하게 노래하기 시작하면, 게다가 그것이 (여기서 다시한번 한숨을 쉬고) 우울한 얼굴마저 곱게 보이는데는 도가 튼 아이도루 애기가 어여쁘게 어여쁘게 부르는 노래면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의도가 담긴 무대인지 말 그대로 황당해지는 겁니다. 당연히 이 무대 위에 선 어떤 캐릭터의 감정도 사람들에겐 와닿지 않고, 거기 대미 장식으로 공포의 남체가 다가와 "묻지~말라구우~"하고 음을 꼬아가며 익살을 떨면 사람들이 쿡쿡거리고 웃을 수밖에 없지요.
웨버 뮤지컬은 한번 쓰인 가락이 다시 쓰이면서 의미를 갖습니다. 저 장면에서 사람들이 쫓겨난 저 아가씨의 처지를 알고 결국 이것이 "추방"의 가락임을 인지해야 나중에 에바가 바로 이 가락을 부르면서 귀부인들을 몰아내고(에바가 귀부인들에게 부를 때에는 난 당신들의 모임에도 참여치 앟고, 당신들의 "홀에서 춤추지도 않아", 당신들이 사라질때까지 보고 있을 뿐이지, 라는 내용으로 내용 연관이 됩니다), 이 가락을 부르며 페론에게 매달릴때 뜻이 와닿게 되는데, 이 장면을 망치니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다른 장면이 붕 뜨는 겁니다 =_= 이번 한국 에비타를 본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어려워 보였다"를 꼽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에비타는 정말 안 어려운 뮤지컬이거든요.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_=
Peron's Latest Flame - Dangerous Jade
여기서 강렬하게 얘기하고 싶은 것.....남자들이 다들 군대 갔다와서 그런지 군인들은 참 연기를 잘 했습니다만, 이 노래의 다른 축인 귀족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짜증이 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역시 번역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연기 문제이기도 합니다. "귀족"이란 문자적으로만 말해도 "귀한 족속들"입니다. 귀한 족속들이 스스로를 귀하다고 주장하는 방법에 대해, 이 나라에 하도 입에 쓰레기통을 달고 사는 졸부들이 많다 보니 감각이 잘 안 오나본데 - 하긴 국회의원이라는 어르신들이 씨발소리 금방도 나오는 나라긴 합니다 - 기본적으로 귀족이라면 자신이 경멸하는 대상을 상스러운 말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귀함을 드러내는 겁니다 =_=
실제 영어가사에서도 귀족들은 "우리들 새에 들어오다니 수치심도 없군" 이라던가 "이 사람 this person"으로 에바를 지칭하며 고상한 말로 비난하고 흉을 보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매우 쉽게 "개년 bitch"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고상한 표현이며, 실제 귀족들의 표정이나 목소리 연기도 대단히 클래식적이고 깔끔하죠. 정경부인들쯤 되면 정난정 같은 것이 자리를 함께 하면 "저년"같은 소리를 안 합니다. 그냥 외면하면서 "자리에 적합치 않은 사람이 있어 불쾌하오" 라고 하지요 =_= 팀라이스도 안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팀라이스는 분명 가사를 그렇게 썼습니다. 직역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살려야 하는데, 귀족들이 너무 천박해서 속이 긁히더군요.(특히 이 스코어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나름 맘에 든 편이었지만 귀족들은 대실망이었습니다. 2막 뒤쪽에 가서야 좀 고운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거기선 에바때문에 속 긁혀서 이래저래 힘들었습니다 그려. 체는 별로 말 더 안 하겠습니다. 이 스코어에 한해서는 체보다 가사 번안이 더 괴로웠습니다. 음절 맞추기를 앞부분에선 제대로 하지도 않아놓고, 결국 또 안이한 번역이었습니다 =_=
A New Argentina
후우 =_= 이 노래는 정말 총체적으로 뭐를 더 문제삼아야 할지 고뇌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 노래는 페론의 우유부단함과 함께 에바의 과단성, 정치적 능력, 정치적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동과 뒤에서 행해지는 뒷공작이 다 드러나야 하는, 1막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곡입니다.
먼저 페론이 사람들이 자길 잡아죽이려 한다고 얘기하면, 에바가 "그런 머저리들 말은 필요없어요. 걔들은 20명이잖아염. 우리는 100만단위의 사람들이 우리 편이삼. 혼란 뒤에는 우리가 왕이삼" 하고 달콤하게(혹은 강하게) 얘기하며 스스로의 야심을 슬그머니 드러내고, 그러면 페론은 "망명하는건 어때? 망명자는 인기도 좋아" 라고 헛소리 하면 페론을 지지하는 민중의 외침을 배경으로 그 헛소리에 대해 반발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합니다. 즉, 여기서 페론은 한쪽에 물러나 있거나 체포되어 있고,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들 앞에 에바가 나타나 그들을 호도합니다. 중간에 페론이 그것만으론 다수표를 얻는 것이 부족하다며 선거부정도 함께 저지르죠. 체는 사람들과 함께 데모하다 끌려가고(한국에선 그냥 도망갑니다) 에바는 형편좋은 소리 하며 디굴거리는 페론을 밀어붙이며 계속 사람들을 선동해 결국 페론의 석방과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한국의 에바는 76년의 강렬한 야심가도, 96년의 강력한 선동가이자 페론의 구원자도 아닌.....OTL "남편에게 힘내라고 응원하며 밖에서 연설하는 현모양처"일 뿐입니다. 가사도 그렇고...번역자와 연출가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짤짤 흔들며 묻고 싶습니다. 남자를 돕는 여자는 무조건 남자를 "보좌"하기 위해서만 활동한다고 믿는 것인지, 그래서 에바의 카리스마도 페론이 무능함도 제대로 배가되지 않는데다 넓은 무대가 썰렁하기 그지없을 정도의 소수 앙상블로(무려 76년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훨씬 알차더군요. 에바는 훨씬 강력한 팜므파탈이고, 페론은 정말 독재자 같아 보였습니다 =_=) 밀어붙이고...김선영씨는 아마 여기서는 정말 음역이 안 받쳐줘서인지 음을 단일음으로 밀어붙여(적어도 갈라지거나 악쓰거나 가성을 내지 않았다는 건 괜찮았습니다만) 내느라 열중 중이었고, 뭔가 페론이 약하지도 잘나지도 않았고 에바도 강하지고 잘나지도 않은 요상 어정쩡한 느낌만 들었습니다.
즉, 전반적으로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1976내지 2006웨스트엔드 버전에 가까운 한국 06년 에비타는, 그러나 캐릭터에 대한 전근대적, 혹은 졸부적 이해감각으로 인해 대단히 OTL스러웠다고 말입니다. 서글프게도, 2막에서는 더한 아스트랄로 마음을 비워야 했습니다.
일단 1막까지 끝내고, 날잡아 2막 감상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총평까지 쓰면 에비타 2006년 한국 버전에 대한 제 평이 대강 마무리지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