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Out..
"하지만 폐하,"
"염려 마시오. 잠시 돌아보고 오려는 것 뿐이니까."
"한 명이라도 대동하고 가셔야 하옵니다. 눈발이 날리지 않사옵니까."
황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바라본 시녀는 자신의 송구스러움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은 바로 자신의 뜻을 결코 꺾지 않겠다는 고집의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해서 호통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 표정일때 복종하지 않으면 냉정하게 내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금방 돌아오겠소. 염려 마시오."
그저 잠시 돌아볼 생각이었다. 북알프스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모피와 두터운 옷으로 든든히 무장해 놓은 터였고, 보온을 위해 산악용의 부츠도 신고 있었다. 게다가, 체력으로는 동행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런 그녀가 어딜 가건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황제도, 대공비도, 쑤군거리기 좋아하는 어느 누구도 그녀의 발길을 막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집시처럼 떠돌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연은 즐길 수 있다.
자연, 그녀는 자연은 사랑했으나 사람은 싫어했다. 사람들은 '모두'를 위한 행동만을 강요했고, 그 '모두'라는 것은 그녀에게 그저 답답한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우리를 이루며 자신을 바라보는 번들거리는 시선들이 싫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녀에게 '익숙해지라'고만 했을 뿐이었지 않나.
자연은 자신들에게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거기서 행할 의무란 단 하나, 감상하고 즐기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호수를, 힘찬 바다를, 광활한 벌판과 드높은 산을 사랑했고,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자연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얀 입김 사이로 작은 눈발이 흩어져내렸다. 그 안에서 곁의 누구도 없이 그저 느끼고 싶었다. 하늘을, 땅을, 그 사이의 바람을, 자유를.
그리고 늘 그렇듯, 생각보다 좀더 오래, 그리고 좀더 멀리 나갔던 것이 실수였다.
알프스의 날씨가 변덕스럽다지만 이 정도였을까. 세찬 바람에 단단히 고정한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며 엘리자베트는 이를 악물었다. 눈발이 굵어지는 것을 느낀 것도 잠시, 일거에 돌풍이 불면서 주위가 온통 눈바다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늘도 땅도 날리는 눈발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랜 여행으로 단련된 자신의 방향감각을 일깨우려 애쓰며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은 얼음칼같이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꼭 조이는 코르셋과 불편한 스커트, 그러나 느리게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로 조난되어 버린다. 이 겨울의 알프스에서.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머무르려던 산장으로 갈 수 있을까? 사방이 휘날리는 눈으로 덮여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이 곳에서 어떻게? 그나마 더듬어가던 길에 다시 돌풍이 닥쳤고, 옆의 바위를 붙들고 간신히 무참한 급습을 견뎌낸 엘리자베트는 절망했다. '오 맙소사' 차가운 몸에 새삼 소름이 돋았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어.' 공포가 몰아온 냉기가 모피를 뚫고 혈관에 스며들어 흘렀다. 천지가 바람으로 가득찼고, 바람을 탄 눈가루가 세상을 희게 만들었다. 방금 자신이 걸었던 곳이 어느 방향인지도 감지할 수 없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발을 헛디딜 터이고 움직이지 않았다간 서서히 얼어죽어갈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얼어버리기 전에, 무섭게 울부짖는 이 바람이 과연 잠잠해질까? 이제 자신이 살 길은 그것밖에 없는데.
- 이건 자살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은 상황인가?
냉정한 목소리가 귀의 영역을 넘어 울려왔을 때, 놀랍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반기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겨? 지금 이 상황에서? '죽음'을? 돌아본 곳에 '그'가 서 있었다. 차갑고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옷자락은 이 강풍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발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이 그를 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만들었다.
- 입이 얼어붙은 것 같은데.
"...당신!"
그제서야 남자는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의 세계로 들어왔나 보다. 한 발 내딛자 검은 구두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고, 긴 자락의 검은 코트가 바람의 흐름을 따라 미친듯 춤추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바람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뿐하게 걸어온 남자는 바위를 붙들고 있는 엘리자베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 여전히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않는군.
그 팔을 바라보며, 그녀는 최대한 진정하기 위해 애써 심호흡을 했다. 코르셋에 갇힌 폐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칼바람이 들어왔고, 새삼 몸에 퍼지는 냉기가 그녀의 머리를 식혔다. 여전히 팔을 내민 남자의 얼굴은 지극히 냉정하고 담담했지만, 그녀의 판단으로는 그가 내민 팔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당신의 짓인가요?"
- 이것?
"눈보라."
- 간만에 들어본 매우 바보같은 질문이군.
조각같은 얼굴은 미동도 하지않아, 어떤 면에서 그 질문이 바보같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서 있자 남자는 포기했는지 팔을 내리고는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눈 사이로 사라져 버리려는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내디딘 순간,
- 오지 않을 셈인가?
돌아보는 얼굴은 언뜻 보면 담담했지만, 그 안에서 극히 미미하게 빛나는 조소를 그녀는 알아챌 수 있었다. 문득 반발심이 치솟아 올랐다. 주변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남자가 뭔가 조처라도 했는지 그들 주변의 바람은 어느정도 잦아들어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위급함은 그다지 개의치 않고 눈앞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하는 거지?"
'호오 이런' 이라는 표정으로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이 가는 방향이 낭떠러지가 아니라고 믿을 근거가 내겐 없어."
- 낭떠러지라고 믿을 근거는 있단 말이로군.
"날 원하고 있잖아."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일견 변화가 없었지만, 늘 그의 얼굴을 보아온 그녀에게는 그의 감정이 손에 잡히도록 분명히 느껴졌다. 몹시 드문 일이었지만, 이 존재는 지금 허를 찔렸고, 그 사실을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흰 여왕의 찌름수에 검은 왕이 당한 것이다. 드문 만큼 기분좋은 일이었다. 주변의 현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 그래서 내가 그대를 속여 '죽음'으로 몰아갈 거라는 건가? 이 '죽음'이?
바람에 날리던 검은 코트자락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흩날리던 금빛 머리카락도 차분히 내려앉았다. 아뿔싸, 흰 여왕은 그제서야 지금의 대국에서 자신이 어떤 처지였는지를 기억해냈고, 차갑게 가라앉아 현실의 공간에서 물러나 앉은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생각을 바꾼 그녀는 푸른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이를 앙다물었다. 일단 이 곳에서 빠져나가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타협이라면 그녀는 이미 수없이 많이 했었지 않은가.
- 그렇다면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군. 한 두시간쯤 있다 올까.
"안돼!"
갑작스러운 외침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정말로 그가 가 버릴까 두려워진 엘리자베트는 급히 그를 향해 달려갔다. 불편한 치맛자락을 휘어잡을 생각조차 못 하고 달린 것이 패착이었을까, 돌 틈새에 걸려 넘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 그러면 무모한 소리는 하지 마.
든든한 팔이 어깨를 붙들어 주었다. 붙들린 곳에서 냉기가 퍼져나오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 팔을 뿌리칠 용기는 없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만용이라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겠지.
'그'의 간섭력은 더욱 커진 듯, 이제 두 사람 주위로는 전혀 바람이 불지 않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휩쓸려 둘의 주위로 날아든 눈송이는 그 힘을 잃고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잦아든 덕에 칼날같은 추위도 좀 가라앉은 듯 했다. 입에서는 여전히 김이 나오고 있었지만.
"놔 줘요."
- 그러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의 그는 정말 '인간'같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지 않는다. 그 체온은 차가우며 그 품은 냉랭하다. 그 모든 것이 두렵고도 매혹적이다. 마치-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 마치 '죽음'이 그러하듯 그는 오싹한 매력으로 가득하다. 소녀시절 이래 몇번이나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뻔했던가. 그리고 삶은 대체 몇번이나 그녀를 다시 붙들었던가. 그리고 그녀는 왜 늘 삶을 택했을까.
- 나도 그게 궁금해.
"?!"
남자는 주위의 바람 소리를 뚫고 또렷하게 들려오는 명징한 음성으로 말했다.
- 넌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하지만 오지 않았어.
"당연해. 난 절대 당신에게 가지 않을 거야."
-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알 거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 순간 치맛자락을 틀어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는 단순한 구애자가 아니다. 그는 죽음이다. 언젠가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가장 깊은 어둠,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절대적인 것. 신을 본 자는 없어도 죽음을 본 자는 숱하게 많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 살아있는 모든 것은 나와 만난다.
"하지만 난 절대 내 발로는 가지 않을 거야."
- 놀랍도록 경박한 속단이군.
"당신은 내 아이를 데려갔어."
- 어차피 데려가게 되어 있지.
"내 눈앞에서!"
- 그것이 그대에게 아무 교훈도 남기지 못했나?
냉정한 어조에 숨이 턱 막혀왔다. 숨이 멎은 작고 싸늘한 몸을 기억하고 있다. 돌보아주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이였다. 빼앗겨 다정하게 몇번 껴안아보지도 못했던 작고 작은 딸이었다. 이름조차 마음대로 붙일 수 없었던 그 어린 것이 놀랍도록 뜨거운 작은 몸으로 엄마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식어갔는데, 교훈이라고? 그것이 교훈이라고?
"그것이 교훈이라면, 난 받아들이지 않겠어!"
그가 휙 돌아섰다. 조각같은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얼굴에서 그가 하려는 말을 읽어냈다. 그것은 그 존재가 말하기도 전 '의지'가 그녀의 마음 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상상을 넘어서는 거대한 존재의 '의지'가 차가운 대기를 넘어 들어왔고, 직후 맑고 뚜렷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 그래서 그대는 모두를 버려두고 도망다니는 건가, 검은 갈매기?
"그만..."
- 뒤에 남겨두고 모든 것을 외면하며?
"그만해!"
- 차라리 빨리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귀를 막았다. 그리고 외쳤다. 듣고 싶지 않아, 당신의 이야기는 듣지 않겠어. 당신이 뭘 알아. 나에 대해, 작은 조피에 대해, 루돌프에 대해 뭘 안다는 거지? 당신은 아는 것이 없어. 사라져 버려, 날 내버려 둬. 도망치겠어. 끝까지 도망쳐 주겠어!
눈물이 고여 세상이 흐렸다. 그 흐린 세상 가운데 서 있던 또렷한 그림자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도망치려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고, 얼어붙은 차가운 손은 너무나 무력하게 그의 손에 붙들려 귀에서 떠났다. 무념한 얼굴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멍하니 바라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훔쳐주었고, 그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 그는 조용히 말했다.
- 그대의 세계가 저기 있군.
어느새 마법처럼 눈앞에 드러난 산장의 검은 그림자에 그녀는 안도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 죽음에게서 벗어났으니 감옥으로 들어가야지.
"난 자유야."
- 어서 가. 더 넓은 감옥의 '자유로운' 죄수여.
스스로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 따위, 그에게도 먹히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산장의 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그 온기넘치는 벽난로가의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방향도 없는 하얀 죽음의 세상에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이리 허망하게 느껴질까? 답하기가 두려워, 그녀는 그 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외면하며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섰다. 황후마마의 안위를 걱정하며 기절할 지경이었던 시녀들의 부산 속에 황후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던 눈물기는 잊혀졌지만, 그 날 그가 남긴 말은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어딜 가건 세상은 감옥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닫게 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