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는 투구를 벗지 않으리. :: 2010/07/10 00:35
/분류없음
입에서 흰 김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는 무겁게 머리에 얹혀 얼굴을 가리고 있는 투구 너머로 살아 있는 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 쏟아지는 형형한 죽음의 푸른 광채에 누군가는 그의 눈을 피하고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으며 누군가는 오히려 용기를 내어 감연히 맞서 쏘아보았다.
등에 진 룬검을 뽑아 두터운 장갑에 감싸인 잿빛 죽은 손에 가져다 대었다. 버클을 풀고 장갑을 떨궈낸 후 칼날을 손에 대었다. 흘러나오는 것은 바깥 공기만큼 차가운 검은 피였고, 푸르스름한 룬이 새겨진 칼날을 타로 흘러내린 검은 피는 그러나 바닥에 닿는 일이 없었다. 칼날이 피를 마셔버린 것이다.
"대체..."
[맹세한다.]
투구 아래서 울려나온 것은 음산한 죽은 자의 목소리. 어딘가 스산한 울림이 섞인 젊은 남자의 음성이 사람들의 등골을 타고 흘러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것이 죽은 자의 목소리인가. 단순히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영혼을 온전히 리치 왕에게 바치고 영원히 저주받은 자들의 목소리.
[내가 죽인 이들의 수만큼 그대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주위가 숨을 삼켰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투구를 벗고 태양을 보지 않으리라.]
목소리와 함께 느리게 흘러가는 안개처럼 따스한 모닥불이 빛나던 실내에 찬 기운이 들어찼다. 바닥에 깔린 털가죽은 더이상 따뜻하지 않았고, 로브를 입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스산한 푸른 안광의 주인은 얼어붙어 갈라진 잿빛 입술 사이로 마지막 맹세의 말을 뱉어냈다.
[이 검은 피가 몸에 흐르는 한, 이 맹세를 지킬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영원이겠지.
다친 손을 내려 그대로 떨어진 장갑을 주워든다. 아직도 섬짓한 속삭임이 울려 오는 듯한 룬검을 등에 지고 기사는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긴다.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한 자는 없었고, 그렇게 새벽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져 가려던 기사는, 한 소녀의 부름에 발을 멈추고, 잠시 소녀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서 있다가 밖을 향했다. 문을 가로막고 있던 가죽이 흔들리고, 어느새 실내는 거짓말처럼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흐느꼈고, 더 많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방금의 광경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한 소녀가 망토조차 제대로 두르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뛰어왔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트롤 소녀는 토끼가죽 다섯 장과 윤기 나는 빨간 사과 한 광주리를 들고 외쳤다.
"기사님이 주고 가셨어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 죽음의 기사, 현자까지 않으로 퀘스트 75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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